[본문]

 

요한복음 9:32-40

 

9: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9: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9: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9: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말씀]

 

제가 원래 악필(惡筆)입니다. 그런데 악필도 두 종류가 있죠. 남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알아볼 수는 있는데 글의 모양은 참 못생긴 글씨가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제 글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글씨 잘 쓴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컴퓨터와 프린터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손으로 글을 쓸 일이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펜으로 글을 쓰는데, 노안이 와서 초점이 잘 안 맞는데다 종이에 글 쓰는 빈도가 계속 줄어들다보니 제 글씨가 엉망이었습니다. 원래 악필이었지만 최근에는 정말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의 감각은 꾸준히 사용하지 않으면 무뎌집니다. 운동선수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이유가 있죠. 아무리 날고 긴 운동선수여도, 군대 몇 년 갔다 오면 실력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운전을 잘했던 사람도 몇 개월 운전을 하지 않으면 오랜만에 운전하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용되지 않는 우리 몸의 감각은 점점 퇴화할 수밖에 없는 거죠.

 

오늘 요한복음 9장을 보면서 이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날 때부터 앞을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참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몸의 장애는 죄의 결과라고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본인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를 묻는 논쟁이었습니다. 지금 대답하라고 해도 참 대답하기 곤란한 이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다른 대답을 하시죠?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명하며 그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래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 이전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게 된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아예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사람의 눈을 누가 고쳤는지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한 후였습니다.

 

그렇게 논란이 일단락되는 줄 알았는데, 그 눈을 뜬 사람과 예수님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흥미롭다고 하는 부분이 이 타이밍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눈을 고쳐준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게 왜 흥미로운 부분인지 다 아실 겁니다. 시각 장애인은 눈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감각이 무척 예민합니다. 특히 청각이 좋습니다. 최근에 대화를 나눈 사람의 목소리는 웬만하면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가 눈이 보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예수님이었고, 예수님 덕분에 그가 눈을 고쳤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그 목소리를 잊을 순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시력이 새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시각을 새롭게 사용하느라 굉장히 신선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난생 처음으로 눈을 사용한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요? 그는 그 이전에 사람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분별했던 그 예민했던 금세 청각을 상실했습니다. 물론 기분 좋은 상실감이었을 겁니다. 이제는 볼 수 있으니 더 이상 목소리를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시각 장애인이 시력을 갖게 되는 것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대답한 한 바리새인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9:40)

 

보던 자가 보지 못하게 되고, 보지 못했던 자들이 보게 된다는 말 자체가 상황의 역전(逆轉)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우리도 맹인인가 라는 바리새인의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을 극대화시키죠.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바리새인이 우리도 맹인인가 라는 말을 하며, 진짜 보지 못하는 사람과 자신들의 위치가 역전되었음을 아이러니하게 고백한 거죠. 그들은 바로 영적인 맹인이 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맹인이 되었다는 걸까요? 그들이 본래의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하게 적용되도록 인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갖는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공감능력을 잃어버렸던 겁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잣대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죄인이라 규정하고 그들을 쉽게 소외시키려고 했었죠. 예수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소외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우리 제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공감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천국 열쇠입니다.

 

 

 [묵상]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의 공감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습니까?

 

 

[기도]

 

내 몸과 같이 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섬기며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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