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5:1-9 (새번역)

 

5:1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5: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5: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5: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5:9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말씀]

 

예전에 한국에 살 때 구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한참 영어를 배울 때 이 거지라는 단어가 영어로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봤었는데, 사전에는 beggar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미국에서 beggar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없으실 겁니다. 이 용어는 실제로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구걸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영어 표현이 따로 있죠. 바로 Homeless(홈리스)입니다. 거지라는 단어 대신에 홈리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를 다 짐작하실 겁니다. 사람을 대놓고 거지라고 지칭하는 것이 비인격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도 거지거렁뱅이라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노숙인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이 용어조차도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노숙인은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단어는 집 없는 홈리스들을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는 어렵습니다. 홈리스는 , 즉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건물만을 의미하진 않죠. 홈은 가정을 뜻할 수도 있고, 이웃과의 친근한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홈리스라는 말은, 가정과 이웃을 통한 관계를 몽땅 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홈리스는 단순히 자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온전한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홈리스들은 나름 모여서 살고 있다곤 하지만,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느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삶의 희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홈리스들의 과거는 각양각색입니다. 저는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홈리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가 화려할지라도, 이들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다수 홈리스들의 삶은 더 나빠질 망정, 좋아지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들은 약간의 돈이 생기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고, 그리고 돈이 더 남으면 술을 사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도 돈이 더 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권을 구입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복권이 당첨되었을 때 이것저것 할 생각으로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남은 돈을 다 복권을 구입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중에는 더 이상의 돈이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홈리스의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지죠.

 

그렇다면 홈리스들은 정말 노숙생활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까요? 사실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권을 구입하며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 일확천금을 바라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바로 이들처럼 희망과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5장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옵니다. 바로 베데스다 연못으로 알려진 곳이죠. 이곳은 자연호수가 아니라 인공호수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200년 전에 시몬이라는 한 대제사장이 이 베데스다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시대에는 각 성읍에서 물로 병자를 치료하는 일이 유행했었는데, 그러한 치료 목적의 연못을 아스클레페이온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데스다도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아스클레페이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병자를 연못의 물을 가지고 치료하는 것이 미신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도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위생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깨끗한 물로 사람들을 씻기고 마시게 하면 실제로 병이 호전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다에 방문하셨을 때, 이곳을 아스클레페이온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부족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든 병자들은 많았지만, 이들의 치료를 돕는 의사는 없었던 겁니다. 본래 아스클레페이온은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베데스다에는 의원은 없고, 병자들만 가득했습니다.

 

이 주랑(柱廊)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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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병의 치료만을 위해 여기 모여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만난 병자는 38년 동안 앓았던 사람이었죠 (5:4).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돌보는 가족이나 지인이 전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7). 이 사람 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프고 장애가 있었지만, 마땅히 함께 할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 베데스다에 모여 살았던 거죠.

 

앞서 홈리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아마도 이 당시 베데스다야말로 홈리스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던 병자처럼, 가족이나 이웃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희망이나 미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이곳에서 연못만 바라보며 살고 있었던 겁니다. 아마 처음에 이곳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땐 모두들 자신들의 병이 나아서, 다시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희망들을 품고 기다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 베데스다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병을 치유하는 것조차도 경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를 다독거리고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눈치를 보고 불신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그리고 그 38년된 병자처럼 치료를 포기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이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본래 이곳에서 병을 고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어쩌다 한 번씩 연못의 물을 휘저어 놓는데, 그 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간 사람만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은, 이러한 미신적인 방법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걷지 못했던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걷고 걸어가라 하고 명령했고, 그는 그 말대로 일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떠한 미래나 희망도 볼 수 없었던 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홈리스처럼 가족이나 이웃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민자들이지만, 우리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이웃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1년 넘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배를 함께 못 드렸다곤 하지만, 우리 교회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는 가끔씩 내가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침체되고 무기력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떠한 소망이나 비전 없이, 그냥 하루하루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거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미래와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걷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향해 걸어가시기 원합니다.

 

 

   [묵상]

 

여러분 삶에 있어서 진정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미래를 향한 소망이 되시나요?

 

 

[기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주님께서 내 희망이 되심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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