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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 말씀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시작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대해 깨닫고, 그 하늘나라를 살게 하기 위해 오셨고, 그 사명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나라,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 중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예수님의 말씀, 하늘나라에 대해 직접 입을 열어 가르쳐 주신 보석과도 같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산상수훈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리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마이크가 없던 시절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주님은 산이라고 되어 있는데, 언덕 쯤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언덕에 오르셔서 무리들을 아래에 두고 설교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앉으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만큼 꽤 오랜 시간 말씀을 하시겠다는 예기구요, 실제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걸쳐 주옥과도 같은 말씀들을 연이어 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팔복, 그 중에서도 첫번째 복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먼저 무리들을 정돈시켰겠죠? 그리고 이제 다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그렇게 되어 있는데, 아마도 무리들이 예수님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지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그 상황 속에 입을 여셔서 하신 첫 마디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대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들어도 자기에게 유리한 말,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중심으로 듣고 또 그렇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보통 “심령이”에 초점을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이 복이라는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사실 “심령이”보다 “가난이 복이다”라는데 더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심령”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다뤄야만 합니다. 가난이 정말 복인가? 제가 만약 “가난의 복 넘치도록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달가워하실 분, 아마 한분도 안 계실 겁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첫 공식설교 첫 마디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누가가 맞는지 아니면 마태가 맞는지, 주님이 “심령이”라는 주어를 말씀 하셨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맥락 가운데 주님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가난한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그렇게 다른 대상이 아니라는 예깁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전혀 복이라고 생각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가난, 그 가난을 복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첫설교를 시작하고 계신 예수님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초점을 둬야 합니다. 왜 주님은 가난을 복이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 이유는 부가, 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복은 하나님 말씀이 들리느냐, 안 들리느냐로 구분되는데,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는 예깁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가난'에 해당하는 원어 '에비온'은 '상대적 빈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상대적 빈곤은 늘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 단어는 '상대적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 다시 말해서 '너무 가난해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그래서 오직 누군가의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가난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고, 그래서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며 구하는 사람, 예수님의 또다른 비유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마태가 “심령이”라는 단어를 붙힌 것은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으로는 가난한데 영적으로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말씀을 받아 영접하지 못합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신세한탄만 늘어 놓습니다. 
반면에 물질적으로는 부하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럽니다. “미쳤나? 교회 가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처럼 열심히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뭡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서 말씀을 사모해서 그런 겁니다. 영적으로 그만큼 가난하고, 영적으로 그만큼 배고프다는 예깁니다.

지식에 대해서도 가난한 사람은 늘 겸손하게 더 배우려고 하고, 그래서 갓난아기에게서도 배웁니다. 그런데 시덥지 않은 사람은 자기는 다 아는 것처럼, 자기만 옳은 것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뭐가 저주입니까? 안 들리는게 저줍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교만한 사람, 이런 사람이 가장 힘든 사람인데 종교개혁자 칼빈이 그랬다고 합니다. “교만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렵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부자가 너무 많습니다.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 같은 부자, 모태신앙을 자랑하고, 직분을 자랑하는 사두개인 같은 부자, 성경을 많이 읽었고,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서기관같은 부자,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도 가르칠 재간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그 당시의 가장 부자들보다 더 좋은 음식에, 더 좋은 옷에, 더 좋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구원받기 정말 어려운 부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 모든 부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가난한 심령으로 설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와은 거리가 먼 불쌍한 부자로 죽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 떄 주님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이르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그리고 맨 뒤에 이런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복음은 모든 이에게 선포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자만이 그 복음을 자신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크리스천 라이프에 연재했던 팔복 중에서> http://www.hismission.org/main/gmb_board_view.php?no=1010&page_no=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