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7일 - 수요예배를 대신하는 묵상 말씀 "노예였던 조상"
2021.07.06 21:43
[본문]
신명기 6:20-21
6: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6: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말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조선시대는 500년 동안 전혀 발전하지 않고 늘 똑같은 과학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늘 똑같은 생활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조선시대에도 과학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했습니다. 가령, 17세기와 18세기의 조선의 과학기술을 비교하면 ‘인쇄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되고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기만 해도 인쇄의 기술이나 설비는 정부기관이나 사찰에만 해당되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면 한반도 전역의 기술자들이 인쇄기를 다룰 정도였습니다.
이 때 재미있는 해프닝이 발생합니다. 인쇄기를 다루는 기술자들은 이 당시 ‘중인(中人)’의 신분이었습니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있는 중간신분으로, 농민이나 상공업,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중인이 인쇄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작업 중의 하나가 양반들의 족보를 인쇄해 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양반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집안의 족보를 손으로 직접 쓴 것보다는 인쇄해서 깨끗하게 기록된 것이 더 권위있게 보였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쇄의 특징은 쉽고 빠르게 책을 똑같이 찍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반들의 족보를 인쇄하다 보니, 이 인쇄기술자들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묘한 청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돈은 있는데 족보가 없어서 양반 행세를 못하던 몇몇 중인들이, 양반의 족보에 슬쩍 자신의 이름을 끼워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족보위조를 부탁한 거죠. 그래서 18세기에 양반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실제로 17세기 말에는 10%도 되지 않았던 양반의 인구가 18세기 말에는 40% 가까이 늘어났고, 19세기에는 70%가 됩니다. 양반이 아닌 사람이 더 적어지는 이상한 사회구조가 된 거죠. 그 변화에 한몫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인쇄술의 발전이었던 겁니다.
물론 인쇄술 자체가 족보를 위조하는 현상을 종용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런 기술의 발전보다는, 양반이 되기를 갈구했던 중인이나 천민들의 신분상승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면에 신분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했던 왜곡된 사회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친구들과 ‘가문’ 얘기를 하면 다들 자기 집안 자랑하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왕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유명한 위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조상을 노비나 중인이라고 설명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70%가 아니라, 100%가 양반인 시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집안의 내력을 속이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만연하듯이,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민족은 자신의 민족이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건국신화(建國神話)’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인 선사시대(先史時代) 때 있었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역사보다는 ‘신화(神話)’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건국신화는 대부분 신성(神聖)한 이야기들로 시작됩니다.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가 대표적이죠. ‘하나님의 아들’ 신분인 환웅이라는 신인(神人)을 아버지로 하고, 시련을 이기고 인간이 된 웅녀를 어머니로 가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우고 한반도에서 첫 나라의 주인이 됩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죠. 이것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집니다. 전 세계의 건국신화는 대부분 신성한 근원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민족이 일어난 것이 신성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서,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권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에 등장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신들이 직접 나라를 세우고 그 민족들을 태동시킨 위대한 민족이라고 자신들의 내력을 과장해서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근원을 이렇게 고백했고 자기 자손들에게도 그대로 가르쳤습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었다고 하라” (신 6:21a)
자신들의 조상이 ‘노예’라고 고백하는 민족은 아마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민족과 나라가 세워진 이야기의 방점이 ‘노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노예였지만)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신 6:21b)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상들이 어떤 신분이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 조상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중요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을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기다림과 소망이 오래 전에 나라를 잃어버리고도 2000년 동안 ‘유태인’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던 거죠.
여러분의 조상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예전에 왕이었거나, 역사책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 여러분의 직계조상이셨나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위대한 분의 자손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김유신 장군의 50대 후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분이 있어도, 그 사람이 가진 김유신 장군의 DNA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정확하게 그 사람이 가진 김유신 유전자는 1/1125899906842624에 불과하죠)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도 나를 진정 일으키시는 분은 돌아가신 내 조상님이 아니죠. 오늘도 살아계시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믿고 오늘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여러분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기도]
돌아가신 선조의 위대함보다는,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