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3일 - 수요예배를 대신하는 묵상 말씀 "슬럼프, 야크 털 깎기, 그리고 초심"
2021.06.22 15:31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13-14
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2: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
요새 제 아내가 피아노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팬더믹이 완전히 끝나면 다시 연주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하루에 몇 시간씩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완전히 풀이 죽어서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연습하는데 슬럼프가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선 또 며칠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신나게 잘 치곤 하죠. 그래서 어떻게 그 슬럼프를 극복했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늘 기본으로 돌아가는데 있는 것 같아.”
사실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것 중의 하나죠. 내가 어떤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써 가며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한 열매도 보이지 않고 내 자신의 성장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슬럼프에 빠진 거죠. 슬럼프(slump)라는 말은 진흙탕처럼 배수가 잘 되지 않는 구간을 뜻합니다. 물이 잘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는 것도 힘들고, 그 땅 자체를 유익하게 활용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햇볕에 물기가 마를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할 때가 있죠. 슬럼프는 이와 같이 정체된 구간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슬럼프에 빠지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처음에 설정한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예로 ‘야크 털 깎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크는 티벳이나 몽골에서 사육되는 긴 털을 가진 소입니다.
따뜻한 털과 단백질을 제공하기 때문에 히말라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목축입니다. 그런데 ‘야크 털 깎기’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원래 목적과 전혀 관계 없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마케터인 세스 고딘(Seth Godin)은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봄이 왔으니 세차를 해야 한다
2) 그런데 호스가 터져서 홈 디포를 가야겠다
3) 홈 디포를 가려면 유료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럼 Fastrak이 필요하겠네
4) 옆집에 가서 Fastrak을 빌려야겠다
5) 그런데 아들이 보이스카웃 가려고 옆집 아들에게 베개를 빌렸는데, 그 베개를 돌려주기 전까지 Fastrak을 못 빌릴 것 같아
6) 베개를 돌려주려고 보니 베개 속이 많이 빠져 있네
7) 베개 속을 야크 털로 채워야겠다
이 논리대로 하면, 세차를 하기 위해 야크 목장에 가서 야크 털을 깎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고작 세차 한 번 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이러한 복잡한 과정이 나름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의 얼개들을 하나하나 풀고 나면 그 과정에서 그 동안 쌓여 있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때문이죠. 가령 위의 이야기에서는, 아들이 옆집에서 빌렸던 베개를 제대로 수선해서 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엉뚱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본래 설정했던 방향을 잃어버린 채로, “내가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하고 묻게 됩니다.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초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처음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병원 건물세를 내기 위해 억지로 일하며 환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힘들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인이 됐는데, 자신이 애써 잡은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기 위해 목회자가 된 건데, 영적 권력에 취해서 섬김과 희생의 정신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하고 되묻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죠. 내가 처음에 마음 먹었던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슬럼프라고 부르는 내 삶의 정체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본래 마음 먹었던 꿈과 소망을 망각하고, 그 과정에서 엉뚱한 것에 걸려있기 때문이죠. 초심을 잃어버렸기에 내가 본래 가고자 했던 방향도 잃어버린 겁니다.
신앙도 슬럼프가 있습니다. 신앙의 슬럼프 역시 초심을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삶을 통하여 이어나가기 위함이죠.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4)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의 슬럼프에 빠지곤 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슬럼프에 빠지지만, 그 근본은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망각한 채로, 내가 해오던 대로 교회생활을 하려고 하니, 내 신앙생활이 하나도 즐겁지 않고 뭔가 정체된 듯한 느낌만 들게 되는 거죠. 본래는 세차를 하려고 했던 건데, 엉뚱한 곳에서 야크 털을 깎고 있으니, 내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신앙의 슬럼프를 겪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사실 많은 분들이 최근에 신앙의 슬럼프를 느끼고 계실 겁니다. 이번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큰 슬럼프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왔던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과 완전히 다른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니, 내 신앙이 전혀 성장하지 않고 정체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슬럼프는 또 다른 축복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슬럼프가 오면 “지금 내가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갖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팬데믹은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래 기능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 중요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팬데믹으로 인해 다 무너지게 되면서, 정말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개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슬럼프가 왔다면 그것은 “내가 정말 회복해야 할 초심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가시기로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묵상]
여러분의 삶에서 느꼈던 슬럼프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여러분의 신앙의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기도]
주님이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여 주셨던 그 크신 사랑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