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9일 - 수요예배를 대신하는 묵상 말씀 "화목하게 하는 직분"
2021.09.28 10:37
[본문]
고린도후서 5:17-20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씀]
먼저 세 개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이것은 TV에서 나왔던 유명한 퀴즈입니다. 보시는 대로 “원숭이”와 “팬더”, 그리고 “바나나”의 세 개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 세 개 중에서,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관련이 있는 것 2개를 선택해서 묶어보세요.
3개 중에 2개를 묶는 방법은 당연히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원숭이 --- 팬더
2) 원숭이 --- 바나나
3) 팬더 --- 바나나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중 어떤 것 2개를 선택하셨나요?
아마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2번을 선택하셨을 겁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기 때문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양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진을 보여주며 2개를 선택하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1번에 있는 원숭이와 팬더를 선택합니다. 원숭이와 팬더가 동물이고, 바나나는 식물이기 때문이죠.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를 시각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의 ‘본질’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동양 사람들은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원숭이란 무엇인가?” “팬더는 또 무엇인가” 라고 하는 그 대상 자체의 이해를 묻는 것이고, 관계 중심이라는 것은 “원숭이와 팬더가 실제로 친한 동물인가?” “바나나는 어느 동물이 먹는가?” 등의 대상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겁니다. 원숭이와 팬더가 함께 어울리는 영화라도 최근에 나왔었다면 모를까, 우리 동양 사람들은 당연히 바나나를 좋아하는 원숭이를 떠올리게 됩니다.
또 다른 유사한 질문이 있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 등장하는 한 가운데 있는 빨간머리의 남자아이는 “지금 행복해 보이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A와 B의 그림 모두 빨간머리 남자아이가 “행복해 보인다” 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동양 사람들은 생각이 좀 다르죠? A 그림에서는 당연히 행복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B 그림에 있는 빨간머리 남자아이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할 겁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요? 앞서 원숭이-바나나 사진 때와 같은 결론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 자신이 행복해 보이면 주위에 상관없이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그 한 사람보다는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살펴보며 그 사람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최근에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앞서 두 문제에 대해, 팬더와 원숭이를 묶은 분들도 계실 수 있고, 두 번째 문제의 B 그림을 보면서 빨간머리 남자아이가 주위와 상관없이 행복해 보인다고 대답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반대로 서양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 동양 사람들처럼 답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서양사회는 여전히 관계보다는 본질을 중시하는 서양인들의 시각을 더 보여줍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대부분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서양인들의 관점이 더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지난 주 설교 때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은 서양인들보다 우리 동양의 문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해석보다, 여러분들 스스로의 생각과 이해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대표적입니다. 누구나 외우고 있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등장하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새 것’이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온 ‘새로운 피조물’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세포가 다 달라졌다는 의미일까요? 그 비밀은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후 5:18a)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전에는 화목하지 못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는 아니었고, 오히려 심판과 저주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었고, 이것을 고린도후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표현한 겁니다.
‘본질’에 관심을 더 가지려고 하는 서양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이 구절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화목함의 관계로 변하였다” 라고만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화목함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죠? 이제는 내가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9절의 이 말씀을 놓쳐서는 안되겠죠.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9b)
예,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가 화목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던 우리 이웃들과 새롭게 화목의 관계로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의 관계의 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예전에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가 미움과 시기로 가득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존재이기에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 또한 사랑과 화목함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미움과 질투보다는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묵상]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한 여러분의 변화가 ‘화목’의 관계로 온전히 나타났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화목함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기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 5:9), 다른 사람들과 화평케 하는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