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2일 - 수요예배를 대신하는 묵상 말씀 "서로를 돌아보자"
2021.09.21 07:30
[본문]
히브리서 10:19-25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
동물학자들은 우리 인간을 동물의 한 종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눈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르죠? 바로 다른 동물에 비해 흰자위가 아주 잘 보인다는 점입니다. 흰자위가 잘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그 눈을 보면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쉽게 잘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동물들을 자세히 보시면 흰자위가 잘 안 보이기 때문에 그 눈이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지 불분명할 때가 많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워 보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동물은 어딘가를 볼 때 눈동자를 움직여서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주로 고개 전체를 돌려서 그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그래서 언뜻 볼 땐 이 동물이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죠.
그에 비해 우리 인간은 멀리서 봐도 그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얼굴표정에 그 시선을 바라보는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어디를 보는지” 뿐만이 아니라, 그 무언가를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까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은 이렇게 다른 동물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을까요” 라는 질문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이렇게 흰자위가 잘 보이는 눈을 가진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떤 다른 행동들을 할까요?” 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도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의문입니다.
눈을 통해 서로의 시선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상호관계적인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눈치챌 수 있는 존재죠. 심지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지금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그 사람의 시선을 통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선을 감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선글라스나 색이 들어간 안경을 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조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시선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심지어 그 사람이 지금 나를 보고 제대로 대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독재자들이 선글라스 착용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옛날 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평민들이 왕의 눈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고개를 숙이게 하거나 왕을 올려다 봐도 그 눈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챙이 긴 모자나 베일로 가리곤 했었죠.
이와 같이 자신의 시선을 감춤으로 인해서 생각이나 감정까지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과 나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 시선을 상대방에게 훤히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나와 다른 사람이 온전하고 대등한 관계를 맺는 전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로의 시선을 잘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끼리는 좋은 관계로 온전히 성장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내 눈과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훤히 드러내고 내 맘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서로 간의 온전한 관계가 시작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오늘 말씀인 히브리서 10장을 읽어보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본래 우리의 죄로 막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쳐져 있던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관계를 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은 완전히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는 시선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온전한 관계가 가능해진 거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듯이,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선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여기서 “서로 돌아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베풀도록 서로 격려하라는 말씀이죠. 당연히 교회 안에서 내 눈을 감추고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선행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내 눈을 보여주고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선한 관계를 맺는 첫단추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 관계도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눈을 맞추고 여러분의 마음을 드러내며 그 사람에게 다가가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회복되는 여러분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여러분은 언제, 또 누구에게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우신가요?
반대로 여러분에게 마음을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기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진 담이 모두 허물어진 것처럼, 우리 관계 안에서의 담들도 모두 허물어지게 하소서